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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청암 송건호 > 연보
 
 
 
 
 

   
 
1926년 (1세)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는 음력 9월 27일(호적상으로는 1927년 9월 27일), 충북 옥천군(沃川郡) 군북면(郡北面) 증약리(增若里) 비야곡(飛也谷)에서 부(父) 송재찬(宋在瓚)과 모(母) 박재호(朴在鎬)의 3남 5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인자한 분이셨고 특히 모친은 너그럽고도 부지런한 전형적인 어머니상을 가진 분이셨다고 한다. 비야곡은 신작로에서 10여 리 떨어진 약 20여 호의 조그만 마을이었는데, 1900년 전후에 이 마을로 이주했다. 가업은 농업. 중농의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보통학교 입학 전에는 한학(漢學)을 배웠다.
   
1934년 (9세) 증약(增若)사립보통학교에 입학하다. 학과성적은 70명 내외의 학급에서 우등이었다고 한다.
   
1935년 (10세) 진학을 위해 충남 대덕군 동면(東面) 동명(東明)공립보통학교 2학년으로 전학하다.
   

1939년 (14세)

충남 대전시에 있는 욱정(旭町)공립보통학교 6학년으로 또다시 전학하다. 이때는 가족 전체가 이사했다.
   
1940년 (15세) 경성 한성(漢城)사립상업학교에 입학하다. 이 학교로의 진학은 부친의 희망에 따른 것이었는데, 부친은 왜놈 밑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냐면서 중학교만 졸업하고 취직할 것을 권고했다고 한다. 이 학교에서 훌륭한 스승의 지도 하에 좋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중학교 때부터 고서점을 찾아다니는 취미를 갖게 되었으며 독서를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과목 중에서는 특히 한문과 역사를 좋아했다. 졸업을 앞두고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둘러싼 일본인 학생과의 차별대우에서 한국인임을 자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46년 (21세)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다. 입학 후 6개월간은 학교를 잘 다녔지만 학교가 격동에 휘말리는 바람에 제대로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1948년 (23세) 국립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하다. 이때부터 학비를 스스로 조달하다.
   
1950년 (25세) 6.25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낙향하다.
   
 
 
 
 
 
1953년 (28세) 서울에 다시 올라와 서울대 법대에 복교. 학교에 다니면서 『대한통신사』 기자 공채에 응모하여 외신부 기자로 들어갔으며 이때부터 언론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정순(李貞順) 여사와 결혼하다. 강원도 춘천이 고향인 이 여사는 당시 대전에 있는 한 여자중학교의 교사로 있었으며, 중매로 충남 조치원에서 결혼식을 했다.
11월에 장녀 희진(熙珍) 출생하다.

 

1954년 (29세) 『조선일보』 외신부가 새로 생김에 따라 이 신문사로 옮기다. 이때부터 평론을 쓰기 시작하여 신진평론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5년 (30세) 고려대학교 50주년 기념 전국학생현상논문 모집에서 1등으로 당선되다.
   

1956년 (31세)

차녀 여금(麗錦) 출생하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다. 8년 만의 졸업이었다.
   
1958년 (33세) 3녀 희정(熙禎) 출생하다. 그리고 이해에 『한국일보』 외신부 차장으로 신문사를 옮기다.
   
1959년 (34세) 『자유신문』 외신부장으로 옮기다.
   
1960년 (35세) 『세계일보』 조사부를 잠깐 거쳐, 6월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들어가다.
   
 
 
 

 

 
1961년 (36세) 장남 준용(準容) 출생하다. 『민국일보』 논설위원을 거친 후 다시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돌아가다.

 

1963년 (38세) 4녀 주연(周姸) 출생.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옮기는 한편 국학대학에 강사로 출강하다. 이때부터 대학에서의 강연도 잦아지게 되었다.
   
1964년 (39세) 「미국과 한국」 등 평론을 발표하다.
   
1965년 (40세) 2남 제용(齊容) 출생하다. 『경향신문』 편집국장에 취임하다. 이 해에 동남아 여러 나라를 순방하다.
   
1966년 (41세)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옮기고 국민대학에 출강하다. 『드골평전』이 출간되었으며 이 책이 일부 유학생간에 물의를 일으키게 되었다.
   
1967년 (42세) 외국어대학에 출강하다. 『한국지식인론』을 펴내다.
   
1968년 (43세) 서베를린 신문연구소에 수학하다.
   
1969년 (44세)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옮기다.
   
 
 
 

 

 
1970년 (45세) 동남아 여러 나라를 순방하다.

 

1971년 (46세) 『동아일보』 내 통일문제연구소장에 취임하다.
   
1972년 (47세) 남북적십자사 자문위원으로 2회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다.
   
1973년 (48세) 『동아일보』 수석논설위원에 취임하다.
   
1974년 (49세)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하다. 편집인협회 보도자유위원장이 되었고 또한 IPI국내위원이 되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다. 기자들은 민주언론운동의 역사에 길이 남을 이 선언의 신문보도를 요구하는 한편, 수사기관원의 신문사 출입을 금지하는 등 선언의 내용을 실천에 옮기려는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다.
   
1975년 (50세) 기자들의 언론자유운동, 민주언론운동이 더욱 세차게 전개되자 정부는 1974년 12월 10일부터 『동아일보』에 대해 유례를 보기 드문 광고탄압을 가하다. 『동아일보』 경영진은 이 같은 탄압에 굴복하는 한편, 거꾸로 권력과 은연중에 결탁하여 자유언론실천기자들을 대거 해고하고 편집국장에게 동의를 요구하다. 언론탄압과 대량해임에 항의하며 기자들이 대대적인 제작거부농성에 들어가자, 3월 15일 “현재의 사태를 수습하는 길은 회사측이 하루빨리 기자들을 복직시키는 것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동아일보』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건의를 내고 편집국장직을 사임하다. 이로써 22년 간에 걸친 언론의 현장을 떠나다. 사임 후에는 원고집필과 번역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한양대학교에 시간강사로 출강하다. 『민족지성의 탐구』 출간하다.
   
1976년 (51세) 당국의 압력으로 한양대학교 출강을 금지당하다. 『조선의 예술』을 번역하는 한편 『단절시대의 가교』를 출간하다.
   
1977년 (52세)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를 출간하다.
   
1978년 (53세) 『씨알의 소리』지 편집위원이 되다. 같은 무렵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NCC)의 인권위원이 되다. 『아쉬움 속의 계절』 『새 역사의 모색』 등 칼럼집과 수상집을 출간하다.
   
1979년 (54세) 『한국현대사론』 『현실과 이상』 『서재필과 이승만』 『소크라테스의 행복』 『무지개라도 있어야 하는 세상』 등을 출간하다.
   
1980년 (55세) ‘5·17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포고령 위반혐의로 체포되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다. 군재(軍裁)에서 3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가 2심에서 2년형으로 감형된 후, 다시 육군형무소에서 형집행정지로 석방되다. 『김구』를 출간하다. (2003년 1월 21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사법부는 무죄를 선고하다)
   
 
 
 

 

 
1982년 (57세) ‘거시기 산악회’에 참가하다.

 

1983년 (58세) 미국 YMCA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으며 이어 서독 등 유럽을 방문하며 강연여행을 하다.
   
1984년 (59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의 회원들이 중심이 된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발족되고 의장에 선임되다. 『말』지 발행. 『한국현대인물사론』을 출간하다.
   
1985년 (60세)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기관지 『말』지가 문제되자 발행인으로서 마포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받다. 『살아가며 고생하며』 『의열단』을 출간하다.
   
1986년 (61세) 제1회 심산상(심산사상연구회)을 수상하다. 『분단과 민족』 『민족통일을 위하여』 『민중과 민족』 『한국현대사론』 등이 간행되다. 11월 2일 회갑을 맞이하여 『청암 송건호 선생 화갑기념문집』이 출간되다.
   
1987년 (62세) 새신문 창간발기위원장으로 취임하고 『한겨레신문』 대표이사를 맡다. 『민주언론 민족언론』을 출간하다.
   
1988년 (63세) 자랑스러운 한성인상을 받다. 『한겨레신문』을 창간하고 초대 사장 및 회장을 역임하다.
   
1989년 (64세) 『한나라 한겨레를 위하여』를 출간하다.
   
1990년 (65세) 파킨슨증후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다. 『한국현대언론사』를  출간하다.
   
 
 
 

 

 
1991년 (66세) 제7회 언론상(서울언론인클럽)을 수상하다. 『한겨레신문』 대표이사와 회장을 역임하다.

 

1992년 (67세) 제2회 한국언론상 본상(한국언론학회)을 수상하다. 공해추방운동연합 고문을 지내다.
   
1993년 (68세) 『한겨레신문』 대표이사 회장에 유임되고, 고문을 지내고 신문로포럼 명예회장을 맡다.
   
1994년 (69세) 제4회 호암상 언론상(삼성복지재단)을 수상하다.
   
1996년 (71세) 도서 1만 5천여 권을 『한겨레신문』에 기증하여 ‘청암문고’를 개설하다.
   
1998년 (73세) 한겨레대상(한겨레신문사)을 수상하다.
   
1999년 (74세) 금관문화훈장을 받다. 기자협회보에서 전국 신문·방송·통신사 편집·보도국장과 언론학 교수를 상대로 설문조사 결과 ‘20세기 최고언론인’으로 위암 장지연 선생과 함께 선정되다.
   
2000년 (75세) 제4회 정일형 자유민주상(재단법인 금연 정일형 박사 기념사업회)을 수상하다.
   
 
 
 

 

 
2001년 (76세) 12월 21일 오전 8시 영면에 들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다. 24일 오전 9시 사회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고 오후 2시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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